2001. 12.『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성리학 도입 이전의 한국 유학


김    현

1. 삼국시대의 유학

2. 통일신라시대의 유학

3. 고려시대의 유학


  송대(宋代) 성리학(性理學)이 우리나라에 도입되기 이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도 유학(儒學)은 우리 민족의 정신 세계를 형성하는 큰 축을 담당하였다. 특히 국정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들에게 통치 이념과 문물 제도의 강령을 제공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유학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는 통치계급의 인물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에서 유교 경전을 교재로 사용하였고, 관리를 임용함에 있어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를 선발의 기준으로 삼아 왔다. 따라서 그러한 과정을 거처 배출된 인물들은 자신의 지식 기반인 유학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그 시대의 사회를 이끌어 가려 했을 것이며,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유학의 인간관과 사회관에 깊이 뿌리를 둔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다만, 고려시대 이전에는 유학이 인간의 정신세계나 우주․자연의 형이상학적 근거를 논구하는 경지로까지 발전하지 않았으며, 현실 사회의 문제에 대처하는 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실천 윤리의 정립과 교화에 주력하였으므로 조선시대 이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사변적인 철학 이론을 남기지는 않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가 고려시대 이전의 유학에 관해서 찾을 수 있는 문헌 자료는 고대․중세 사회의 교육․행정 제도의 성립 과정에서 유학이 담당한 역할과 유학을 공부한 그 시대의 지식 계급의 인물들이 자신이 가치관을 사회화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을 일단을 살필 수 있는 것에 국한된다.

  유학, 그것도 성리학만이 사회 유일의 철학 이론이자 가치 규범으로 자리하여 온 국민의 지적 능력이 그 한 곳으로 집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고려시대 이전의 유학이 남긴 지식 유산의 규모와 심도는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국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 유교 경전의 의미를 해득하고 유교의 윤리와 예법을 우리의 것으로 소화하여 사회적으로 확산시켜 온 부단한  노력이 있지 않았다면 조선시대의 유학은 뿌리를 내릴 터전을 갖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것과 같은 심오한 철학 이론의 발전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리학 도입 이전의 유학에 대한 탐구가 한국 사상의 총체적인 이해는 물론 조선 유학의 발전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 삼국시대의 유학


1) 문자의 도입과 사서의 편찬


  [해설]


  성리학 이전의 선진유학(先秦儒學) 또는 한당유학(漢唐儒學)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도입되었는지는 알게 하는 문헌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 유학의 역사적 시발점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한사군(漢四郡) 설치 이전부터 한문(漢文)을 쓰기 시작한 사실은 한문 문헌(文獻)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한 사실을 시사하며 그 문헌의 종류는 유교(儒敎) 경전류(經典類)에 속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으므로 한국 유학의 출발은 한문은 사용하는 기록 문화의 발전과 그 시발점을 같이 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1)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각 한문을 사용하여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史書)를 편찬하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서의 편찬은 단순히 문자의 사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바라보는 일정한 견해를 갖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의 역사책에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역사를 기록하였다는 그 사실에서 자연과 인간을 일정한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고대인의 노력이 시작되었으며 거기에는 중국으로 전수된 유교적인 인간관․자연관이 반영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원문 번역]


  □ 고구려의 사서 편찬


  태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도록 하였다. 국초(國初)에 문자를 쓰기 시작하였을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詔大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三國史記』권 20 高句麗本紀 8 榮陽王 11년(서기 600년) )


  □ 백제의 사서 편찬


  고기(古記)에 의하면, “백제는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적이 없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흥은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近肖古王 30년(서기 375년) )


  □ 신라의 사서 편찬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는 임금과 신하의 선악(善惡)을 기록하여 포폄(襃貶)을 만대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를 편찬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무엇을 볼 수 있겠읍니까?”라고 하니, 왕이 진실로 그렇다고 여겨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명하여 선비들을 널리 모아 편찬하게 하였다.


  伊湌異斯夫奏曰: “國史者, 記君臣之善惡, 示襃貶於萬代; 不有修撰, 後代何觀?” 王深然之, 命大阿湌居柒夫等, 廣集文士, 俾之修撰. (『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眞興王 6년(서기 545년) )


2) 세속오계(世俗五戒): 유교적 실천 규범의 도입


  [해설]


  삼국시대의 유학은 일정한 형식을 갖춘 교학 이론으로 강구되기 이전에 일상적인 삶의 부분 부분을 계도하는 생활 윤리로서 소개되었고, 그것의 실효성이 입증되어 감에 따라 보다 적극적으로 국가의 문물 제도에 반영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교적인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생활 속의 실천 윤리로 삼은 대표적인 사례는 신라 화랑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에서 선진 문화를 공부하고 돌아온 당대의 지식인 원광법사(圓光法師)2)가 귀산(貴山)3) 등의 청년 화랑에게 전수한 다섯 가지 조항은 유교의 대표적인 윤리 덕목인 삼강 오륜을 당시 신라 사회의 현실적 요청에 맞도록 응용한 것이다. 세속오계 중 다섯 번째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유독 불교적인 덕목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나 그 실제 내용은 번식기에 있거나 다 자라지 않은 생물의 살생을 피하라는 것, 즉 자연의 생육 질서에 순응하라는 것으로서 이 역시 유교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4) 또한 원광법사는 불교 승려이기는 하나 그 시대의 승려는 대표적인 지식 계급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고려하면, 원광의 세속오계는 불교 승려가 제시한 덕목이라기보다 현실 계도의 책임을 진 지식 계급의 인물이 계도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 번역]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아버지 무은(武殷)은 아간(阿干) 벼슬을 지냈다. 귀산은 젊은 시절 같은 부(部)의 사람 추항(箒項)과 친구가 되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 “우리가 학문이 있고 덕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면서도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수양하는 것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치욕을 부르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다. 어찌 어진 사람 곁에서 도를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 등이 그 문에 나아가 옷자락을 걷어 잡고 말하기를 “저희들 세속 선비는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사오니 원컨대 한 말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 삼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하기를,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忠)으로써 할 것,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할 것,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할 것, 넷째는 전쟁에 다다라서는 물러서지 말 것, 다섯째는 생명 있는 것을 죽이는 데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만 말씀하신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법사가, “육재일(六齋日)5)과 봄 여름철에는 살생치 아니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안되니, 말, 소, 닭, 개를 말하며, 작은 동물을 죽이지 않는 것이니, 이는 고기가 한 점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직 꼭 필요한 것만 죽이고 많이 죽이지 말 것이다. 이것은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귀산 등이 “지금부터 받들어 실천하여 어그러뜨리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貴山, 沙梁部人也. 父武殷阿干. 貴山少與部人箒項爲友. 二人相謂曰: “我等期與士君子遊, 而不先正心修身, 則恐不免於招辱. 盍聞道於賢者之側乎?” 時圓光法師, 入隋遊學, 還居加悉寺, 爲時人所尊禮. 貴山等詣門,  摳衣進告曰: “俗士顓蒙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行之無忽.” 貴山等曰: “他則旣受命矣; 所謂殺生有擇, 獨未曉也.” 師曰 “六齋日·春夏月不殺, 是擇時也. 不殺使畜, 謂馬牛雞犬; 不殺細物, 謂肉不足一臠: 是擇物也. 如此唯其所用, 不求多殺, 此可謂世俗之善戒也.” 貴山等曰: “自今已後, 奉以周旋, 不敢失墜.” (『三國史記』권 45 列傳 5 貴山 )



2. 통일신라시대의 유학


1) 유학 교육과 인재 양성


  [해설]


  신라는 군사적․외교적으로 통일의 역량을 키워 나아갈 무렵 국정을 담당할 인재의 양성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대학의 설립을 계획하였다. 진덕왕 1년(서기 647년)에 신라의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김춘추(金春秋)6)는 그곳의 국자학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직접 참관하고 돌아와 대학 교육을 담당할 관직인 대사(大舍)를 설치하였고,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신문왕(神文王)7)이 당의 국자학을 모방하여 국학8)을 설립하여 당대의 유학 자 강수(强首)9)․설총(薛聰)10) 등으로 하여금 유교 경전을 교육하게 하였다. 귀족의 자제들에게 치인의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된 국학에서 유교의 경전은 통치술을 가르치는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그후 원성왕(元聖王)11) 대에 이르러 귀족들의 학문적 소양을 평가하여 관직을 부여하는 최초의 과거제도가 시행될 때12)에도 『예기』․『논어』․『효경』 등의 유교 경전은 가장 중요한 시험 과목으로 채택되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국가적인 인재 교육의 방편으로 유교 경전의 교육에 치중하였다는 사실은 유교적인 통치 이념과 통치술에 의존하여 통일 국가의 경영을 꾀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원문 번역]


  □ 국학(國學)의 설립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하였는데 신문왕 2년(서기 682년)에 설치하였다. ..... 교수하는 법은 주역(周易)· 상서(尙書)· 모시(毛詩)· 예기(禮記)·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선(文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수업하게 하는 것이었다.  박사나 또는 조교 1명이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 또는 『춘추좌씨전』․『모시』․『논어』․『효경』,  또는 『상서』․『논어』․『효경』․『문선』을 가르쳤다.


  國學屬禮部, 神文王二年置. .....  敎授之法, 以周易․尙書․毛詩․禮記․春秋左氏傳․文選, 分而爲之業. 博士若助敎一人, 或以禮記․周易․論語․孝經, 或以春秋左傳․毛詩․論語․孝經, 或以尙書․論語․孝經․文選敎授之.  (『三國史記』권 38 雜志 7 職官上 國學 )


  □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시행


  처음으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하였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예기(禮記)』 또는 『문선(文選)』을 읽어서 그 뜻에 능통하고 아울러 『논어(論語)』와 『효경(孝經)』에 밝은 사람을 상품(上品)으로 하고, 『곡례(曲禮)』· 『논어』· 『효경』을 읽은 사람을 중품(中品)으로 하고, 곡례와 효경을 읽은 사람을 하품(下品)으로 하였으며, 만약 오경(五經)과 삼사(三史) 그리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두루 능통한 사람은 등급을 뛰어 넘어 이를 등용하였다. 전에는 단지 활 쏘는 것으로 인재를 선발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고쳤다.


  始定讀書三品以出身. 讀春秋左氏傳若禮記若文選, 而能通其義, 兼明論語·孝經者爲上; 讀曲禮·論語·孝經者爲中; 讀曲禮·孝經者爲下; 若博通五經·三史·諸子百家書者, 超擢用之. 前祇以弓箭選人, 至是改之. (『三國史記』권 10 新羅本紀 10 元聖王 4년(서기 788년) )


2) 통일신라 시대의 유교적 지식인


  [해설]


  통일 신라 시대에 유학은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며 일반인의 삶을 계도하는 지식인들의 학문적 소양으로서 자리잡았다. 그들의 유학은 아직까지 조직적으로 체계화된 철학 사상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현실을 이해하고 민중을 계도하는 데 필요한 이념과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은 충실히 수행하였다. 신문왕 대에 설립된 국학의 교수 요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강수(强首)의 간략한 전기는 당시 사람들이 유학의 본령과 그 효용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한다. 또한 신라는 하대로 가면서 중국에 건너가 그곳의 학문을 직접 접하고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과거를 통과하여 행정관료의 경험을 쌓은 지식인들도 여럿 배출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출신으로 중국에서 배우고 키운 뜻을 고국 신라에서 펼치려 했던 최치원(崔致遠)13)의 글 속에서는 보다 심화된 유교적 학문 소양의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원문 번역]


  □ 강수(强首)


  아버지가 그 뜻을 알아보고자 “너는 불교를 배우겠느냐? 유교를 배우겠느냐?” 하고 물으니, (강수가) 대답하였다.

  “제가 듣기로  불교는 세속을 떠나는 것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저는 인간 세계의 사람이니 어찌 불교를 배우겠습니까?  유학자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좋은 대로 하라!” 하였다. 드디어 스승을 찾아가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읽었는데 비근한 것을 듣고서도 고원한 것을 깨달아 당시의 탁월한 인걸이 되었다.


  父欲觀其志, 問曰: “爾學佛乎, 學儒乎?” 對曰: “愚聞之, 佛世外敎也. 愚人間人, 安用學佛爲, 願學儒者之道.” 父曰: “從爾所好!” 遂就師讀孝經·曲禮·爾雅·文選, 所聞雖淺近 而所得愈高遠, 魁然爲一時之傑 (『三國史記』 권 46 列傳 6 强首 )


  □ 최치원(崔致遠)


  제가 듣기로, “왕자가 조종의 덕을 기반으로 삼아 후손을 위한 계책을 세움에 있어서 정치는 인을 근본으로 하고, 예는 효를 우선한다.”고 하였읍니다.  대중을 구제하는 정성으로써 인을 행하고, 어버이를 받드는 전례로써 효를 행하며, 하범(夏範)의 ‘치우치지 않음’14)을  본받지 않음이 없고 주시(周詩)의 ‘효성을 이루 다할 수 없음’15)을 따르지 않음이 없으며,  조상의 덕을 이어받아 닦음에 있어 성숙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없애고, 조상의 제사를 잘 받듦에 있어 하찮은 제수라도 정결히 올린다면 두터운 은혜가 백성에게 고루 젖어들어 덕의 향기가 끝없는 하늘에 높이 사무칠 것입니다.


  臣聞: “王者之基祖德而峻孫謀也, 政以仁爲本, 禮以孝爲先.” 仁以推濟衆之誠, 孝以擧尊親之典, 莫不體無偏於夏範, 遵不匱於周詩, 聿修芟秕稷之譏, 克祀潔蘋蘩之薦, 俾惠渥均濡於庶彙, 德馨高達於穹旻. ( 「大崇福寺碑序」, 『孤雲集』권 3 碑 1a-1b)



3. 고려시대의 유학


1) 유교적 통치 이념의 정립


  [해설]


  고려는 신라와 후백제를 병합하여 분열된 나라를 다시 통일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초창기 정치적 형세는 건국의 주역으로 참여한 여러 이성(異姓) 귀족간의 연립 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못하였으며, 사상면에 있어서도 신라 하대와 후삼국 시대의 분열기에 득세하였던 선불교(禪佛敎), 풍수지리(風水地理) 사상 등이 여전히 영향력을 떨치고 있어서 통일된 정치적 지도 이념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분산된 정치 권력을 왕실을 중심으로 수습하여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의 여러 구성원을 결집시킬 수 있는 일관된 통치 이념의 정립이 필요하다. 유교의 윤리 규범은 그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가치관으로서 그 영향력을 키워가기 시작하였다.

  태조 왕건(王建)16)이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17)는 불교와 풍수지리 사상에 입각한 내용을 함께 포함하고 있어서 유교적 가치관만을 전일하교 표방한 것은 아니지만, 민본 정신과 군신간의 신뢰 화합을 강조하고 경사를 정치의 귀감으로 삼을 것을 명한 것은 통치의 강령을 유교적 사고에 두도록 한 것이다.

  국초의 혼란과 위기를 수습하고 문물 제도의 정비를 이룩한 성종(成宗)18)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유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의 양성에 힘썼으며 전국적으로 효자 열녀를 찾아 표창하는 등 유교적 윤리관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였고 최승로(崔承老)19)와 같은 유학자를 등용하여 국정의 유교주의적 노선을 강화하였다.

  최승로가 성종에게 올린 시무책(時務策) 28 조20)는 국가 경영의 이념과 시책이 유교적 교학을 위주로 할 것을 강력하게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승로의 시무책은 일개 유교적 지식인의 제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려말기까지 이어진 고려의 국가 경영의 강령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원문 번역]


  □ 태조의 훈요십조 (제7조)

 

  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로되,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면 그 요체는 간언(諫言)을 따르고 참소(讒訴)를 멀리 하는 것뿐이다. 간언(諫言)을 따르면 성군(聖君)이 될 것이니 참언(讒言)이 꿀처럼 달아도 믿지 않는다면 참언은 스스로 그치게 된다.  또 백성을 부리기를 때를 가려 하고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세부(稅賦)를 적게 하며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면 스스로 민심을 얻게 되어 나라는 부유하여지고 백성은 평안해 질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향기로운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걸려드는 고기가 있고 상을 후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좋은 장수가 있으며 활을 당기는 곁에는 반드시 피하는 새가 있고 인(仁)을 베푸는 곳에는 반드시 선량한 백성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올바르면 음양(陰陽)이 순조롭게 될 것이다.


  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 欲得其心, 要在從諫遠讒而已. 從諫則聖; 讒言如蜜不信, 則讒自止. 又使民以時, 輕徭薄賦, 知稼穡之艱難, 則自得民心, 國富民安. 古人云: “芳餌之下, 必有懸魚; 重賞之下, 必有良將; 張弓之外, 必有避鳥; 垂仁之下, 必有良民.” 賞罰中, 則陰陽順矣. (『高麗史』권 2 世家 2 太祖 26년(서기 943년) 4월 )


  □ 효자․절부의 표창을 명한 성종의 교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근본이 되는 것에 힘써야 하며, 근본에 힘쓰는 것은 효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이는 삼황(三皇) 오제(五帝)의 본래 임무이며 모든 일의 기강이요 온갖 선(善)의 주인이다. 이러므로 한(漢) 나라 황제는 양인(楊引)21)의 부모 공경을 가상히 여겨 그의 집안과 마을을 표창하였으며 진(晉) 나라 황제는 왕상(王祥)22)의 지극한 효성을 기리기 위해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그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였다. 과인은 어려서 어버이를 잃었고 자라서도 또한 용미(庸味)한데 외람되이 왕위를 이어 받아 종조(宗祧)를 이어 지키게 되었다. 조고(祖考)의 평소 모습을 추모하니 세월(歲月)의 덧없음에 마음 상하고 형제의 옛 일을 생각하니 더욱 간절한 정을 느끼는 바이다. 그러한 까닭에, 육경(六經)의 법칙을 취하고 삼례(三禮)의 규범에 의지하여 찾아 온 나라의 풍속이 모두 오효(五孝)23)의 문(門)에 귀의하기를 하기를 바라노라.

  (효자(孝子), 순손(順孫), 의부(義夫), 절부(節婦) 16명에 대한 표창 기사 생략)

  아아 임금은 만백성의 머리이며 만백성은 임금의 배와 심장이니, 백성이 착한 일을 하면 이것은 곧 나의 복(福)이요, 백성이 악한 일을 하면 이것은 또한 나의 근심이다.  어버이를 봉양하는 효행을 빛냄으로써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마음을 표창(表彰)하노라. 전야(田野)의 어리석은 백성들도 힘써 효를 생각하거늘 관직에 있는 군자들이 어찌 선대를 받들기를 게을리 하리오! 능히 집안에서 효자가 될 수 있다면 나라에서는 반드시 충신이 될 것이다.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나의 말을 되새길 것이다.


  凡理國家, 必先務本; 務本, 莫過於孝. 三皇五帝之本務, 而萬事之紀, 百善之主也. 由是, 漢皇嘉楊引之尊親, 旌門表里; 晋帝獎王祥之至孝, 命史書名. 寡人幼而藐孤, 長亦庸昧, 叨承顧托, 嗣守宗祧. 追思祖考之平生, 幾傷駒隙; 每念兄弟之在昔, 益感鴒原. 是以, 取則六經, 依規三禮, 庶使一邦之俗, 咸歸五孝之門. .....

  於戱, 君后萬民之元首, 萬民君后之腹心; 若有爲善, 是吾福也, 若有爲惡, 亦吾憂也. 光顯奉親之行, 用彰美俗之心. 田野愚氓, 尙勤思孝; 搢紳君子, 其怠奉先! 能爲孝子於家門, 必作忠臣於邦國. 凡諸士庶, 可復予言.  (『高麗史』권 3 世家 3 成宗 9년(서기 990년) 9월 )


  □ 최승로의 시무책 (제14조, 제20조)


  [제14조] 『역(易)』에 이르기를, “성인이 인심을 감동시키니 천하가 화평하다” 하였고,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일부러 하는 일 없이 다스린 자는 순(舜) 임금이로다! 무슨 일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하였을 따름이다”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천인(天人)을 감동시킬 수 있는 까닭은 그 순일한 덕을 가지고 있고 사사로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마음을 겸손하게 지니고 항상 경외하며 신하를 예우하신다면 어느 누가 심력(心力)을 다해 나아가서는 계책을 아뢰고 물러나서는 널리 보탬이 되도록 하지 않겠읍니까? 이것이 이른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대하면, 신하는 임금을 충으로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임금께서는 매일 매일 삼가 하루라도 스스로 교만하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공손하게 대접하되,  혹 죄가 있는 경우에는 가볍든 무겁든 모두 법대로만 논하신다면 태평의 업(業)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제20조] 불법(佛法)을 믿는 것이 비록 선이 아님은 아니나 제왕(帝王)이 공덕을 닦는 것과 보통 사람이 공덕을 닦는 것은 그 실정에 차이가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수고롭게 하는 것이 자신의 힘이요 소비하는 것도 자기의 재물이니  해(害)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않으나 제왕(帝王)은 백성의 힘을 수고롭게 하고 백성의 재물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옛날 양 무제(梁武帝)가 천자의 존귀한 지위에 있으면서 필부(匹夫)가 하는 방식으로 선(善)을 닦은 것에 대해 사람들이 잘못이라고  여긴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왕은 깊이 그 이유를 생각하여 일이 모두 중도에 맞고, 폐단이 신민에게 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신은, “사람의 화복과 귀천은 모두 날 때부터 타고 난 것이니 마땅히 순순히 받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물며 불교를 믿는 것은 단지 내생(來生)의 인과를 심는 것으로서 (현세에서) 보상을 받는 데에는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삼교(三敎)24)는 각각 전문으로 하는 바가 있으니, 그것을 따라 행하는 것도 서로 섞어서 한 가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유학의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이국(理國)의 근원입니다. 수신(修身)은 내세를 위한 자산이지만, 이국(理國)은 금일에 힘써야 할 일입니다.  금일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먼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임금은 마땅히 한 마음으로 사사로움을 없애고 널리 만물을 구제해야 할 터인데, 어찌 원하지 않는 사람을 동원하고 창고의 저축을 소비하여 있지도 않을 이익을 추구하겠습니까? 옛날 덕종(德宗)의 장인 왕경선(王景先)과 사위 고념(高恬)이 성수(聖壽)의 연장을 위하여 금강불상(金剛佛像)을 만들어 바쳤더니 덕종(德宗)이, “짐은 공덕(功德)을 일부러 얻으려 해서는 공덕(功德)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고 그 불상을 두 사람에게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그 실상이 정말로 그렇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신민으로 하여금 이익 없는 일은 하지 말게 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易曰: “聖人感人心而天下和平.”, 語曰: “無爲而治者, 其舜也歟!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 聖人所以感動天人者, 以其有純一之德, 無私之心也. 若聖上執心撝謙, 常存敬畏, 禮遇臣下, 則孰不磬竭心力, 進告謀猷, 退思匡贊乎? 此所謂‘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者也. 願聖上日愼, 一日不自驕滿, 接下思恭, 儻或有罪者, 輕重並論如法, 則大平之業, 可立待也.

  崇信佛法, 雖非不善, 然帝王士庶之爲功德, 事實不同. 若庶民所勞者, 自身之力, 所費者, 自己之財, 害不及他; 帝王則勞民之力, 費民之財. 昔梁武帝, 以天子之尊, 修匹夫之善, 人以爲非者, 以此. 是以, 帝王深慮其然, 事皆酌中, 弊不及於臣民. 臣聞: “人之禍福․貴賤皆稟於有生之初, 當順受之.” 況崇佛敎者, 只種來生因果, 鮮有益於見報, 理國之要, 恐不在此. 且三敎各有所業, 而行之者不可混而一之也. 行釋敎者, 修身之本; 行儒敎者, 理國之源. 修身是來生之資, 理國乃今日之務. 今日至近, 來生至遠; 舍近求遠, 不亦謬乎? 人君, 惟當一心無私, 普濟萬物; 何用役不願之人, 費倉庫之儲, 以求必無之利乎? 昔德宗妃父王景先․駙馬高恬, 爲聖壽延長, 鑄金銅佛像, 獻之; 德宗曰: “朕以有爲功德, 謂無功德.”, 還其佛像於二人. 是其情雖不實然, 欲令臣民不得作無利事者, 如此.  (『高麗史』권 93 列傳 6 諸臣 崔承老 )


2) 고려 중기 유학의 부흥


  [해설]


  고려시대의 유학은 문종(文宗)25)으로부터 예종(睿宗)26)․인종(仁宗)27)에 이르는 100년간에 왕의 학문 애호, 문인귀족의 세력 강화에 힘입어 크게 융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특히 사학(私學)과 관학(官學)이라고 하는 두 종류의 교육 시스템이 체제를 갖추어 귀족의 자제들에 대한 인문 교육을 강화하였는데, 그 교육 내용의 중심은 물론 유교 경전에 대한 학습이었으며, 교육의 목적은 과거를 통한 입사에 있었다. 이러한 교육 체제의 정비를 통해 학문적 소양을 갖춘 문인 귀족의 관료 등용 체계가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유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이들의 정치적 입지를 뒷받침해 주는 수단으로서 크게 융성할 수 있었다.

  문종조의 재상 최충(崔冲)28)이 설립한 문헌공도(文憲公徒)는 고려 중기에 융성한 12 개 사학의 효시로서 사학의 발전을 주도한 기관이었다. 문헌공도의 9 개 교육 과정의 명칭 가운데 성명(誠明),  솔성(率性) 등 성리학에서 중요시된 중용의 개념어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중국 송대 성리학이 이 당시에 이미 개략적으로나마 소개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사학의 융성에 맞서 예종조에는 국학(國學)29)을 중심으로 한 관학이 재정비되어 6경(六經)과 무학(武學)을 교육하였다. 그러나 이 관학 정비에 대해 선비들은 환영하였으나 대신들은 매우 소극적이었다고 하는 사실은 기득권자 중심으로 형성된 학연의 벽이 이미 높아졌음을 알게 한다.


  [원문 번역]


  □ 사학의 부흥


  사학은 문종조(文宗朝)에 대사(大師) 중서령(中書令) 최충(崔冲)이 후진을 불러모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니 귀족과 평민이 문 앞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드디어 9재(齋)로 나누어 낙성(樂聖) 대중(大中) 성명(誠明) 경업(敬業) 조도(造道) 솔성(率性) 진덕(進德) 대화(大和) 대빙(待聘)이라 하고 이를 시중(侍中) 최공도(崔公徒)라고 하였는데 의관(衣冠) 자제(子弟)로 과거(科擧)에 응시(應試)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도중(徒中)에 들어가 학습하였다. 해마다 여름에 승방(僧房)을 빌려 여름 공부를 하였고, 학생 중에 급제(及第)한 자로서 학문과 재능이 뛰어나지만 아직 벼슬하지 않은 택하여 교도(敎導)로 삼았으며, 배우는 것은 구경(九經)과 삼사(三史)였다. 간혹 선진(先進)이 들르면 촛불에 금을 그어 시간을 한정하여 시를 짓게 하고 그 등수를 방(榜)에 써서 알리고 이름을 불러 들어오게 한다. 이윽고 술자리를 베푸니 아이와 어른이 좌우에 벌여 서서 술과 안주를 받드는데 진퇴(進退)에 예의가 있고 장유(長幼)의 질서가 있어 해가 지도록 떠들도 노래하여도 보는 이가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후로부터 과거를 보고자 하는 자는 모두 9재(齋)의 명단에 이름을 두니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 불렀다. 또 유신(儒臣)으로 도(徒)를 설립한 자가 11인이 있으니 홍문공도(弘文公徒)는 시중(侍中) 정배걸(鄭倍傑)이 세웠는데 일명 웅천도(熊川徒)라고 하며, 광헌공도(匡憲公徒)는 참정(參政) 노단(盧旦)이 세웠고, 남산도(南山徒)는 좨주(祭酒) 김상빈(金尙賓)이 세웠고,  서원도(西園徒)는 복야(僕射) 김무체(金無滯)가 세웠고, 문충공도(文忠公徒)는 시중(侍中) 은정(殷鼎)이 세웠고, 양신공도(良愼公徒)는 평장(平章) 김의진(金義珍) 또는 낭중(郞中) 박명보(朴明保)가 세웠다고 하며, 정경공도(貞敬公徒)는 평장(平章) 황영(黃瑩)이 세웠고, 충평공도(忠平公徒)는 유감(柳監)이 세웠고, 정헌공도(貞憲公徒)는 시중(侍中) 문정(文正)이 세웠고, 서시낭도(徐侍郞徒)는 서석(徐碩)이 세웠으며, 구산도(龜山徒)는 누가 세웠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들을 문헌공(文憲公) 충(沖)의 도(徒)와 아울러 세칭(世稱) 12도(徒)라 하나 충(冲)의 도(徒)가 그 중에서 가장 성하였다.


  凡私學, 文宗朝大師中書令崔冲, 收召後進, 敎誨不倦, 靑衿白布, 塡溢門巷. 遂分九齋, 曰:樂聖․大中․誠明․敬業․造道․率性․進德․大和․待聘, 謂之侍中崔公徒, 衣冠子弟, 凡應擧者, 必先肄徒中而學焉. 每歲暑月, 借僧房, 結夏課; 擇徒中及第, 學優才贍, 而未官者, 爲敎導; 其學, 則九經․三史也. 閒或先進來過, 乃刻燭賦詩, 榜其次第, 呼名而入, 仍設酌, 童冠列左右, 奉樽俎, 進退有儀, 長幼有序, 竟日酬唱, 觀者莫不嘉嘆. 自後, 凡赴擧者, 亦皆肄名九齋籍中, 謂之文憲公徒. 又有儒臣立徒者, 十一: 曰弘文公徒, 侍中鄭倍傑, 一稱熊川徒; 曰匡憲公徒, 參政盧旦; 曰南山徒, 祭酒金尙賓; 曰西園徒, 僕射金無滯; 曰文忠公徒, 侍中殷鼎; 曰良愼公徒, 平章金義珍, 一云郞中朴明保; 曰頁敬公徒, 平章黃瑩; 曰忠平公徒, 柳監; 曰貞憲公徒, 侍中文正; 曰徐侍郞徒, 徐碩; 曰龜山徒, 未詳. 幷文憲公冲徒, 世稱十二徒, 然冲徒最盛. (『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


  □ 관학 진흥


  예종(睿宗) 즉위하자 제칙(制勅)을 내려 3경(京) 8목(牧)의 통판(通判) 이상 및 지주사(知州事)와 현령(縣令) 중에 문과(文科)로 출신(出身)한 자는 학사(學事)를 주관하는 일을 겸하게 하였다. 2년에 제칙(制勅)을 내려, “학교를 설립하여 어진이를 기르는 것은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인데도 유사(有司)의 의론이 아직 정하여지지 못하였다. 신속히 시행하라.”고 하였다. 예종(睿宗)이 학문에 관심을 가져 이 제칙을 내린 것이었는데, 선비들은 모두 기뻐하였으나 대신(大臣)은 한 사람도 따르지 않아  시의(時議)가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4년 7월에 국학(國學)에 7재(齋)를 두었는데 『주역(周易)』을 공부하는 곳을 여택(麗澤)이라 하고 『상서(尙書)』를 공부하는 곳을 대빙(待聘)이라 하고 『모시(毛詩)』를 공부하는 곳을 경덕(經德)이라 하고 『주례(周禮)』를 공부하는 곳을 구인(求仁)이라 하고 『대례(戴禮)』를 공부하는 것을 복응(服膺)이라 하고 『춘추(春秋)』를 공부(貢赴)하는 것을 양정(養正)이라 하고 무학(武學)을 공부하는 곳을 강예(講藝)라 하였다. 대학(大學)의 최민용(崔敏庸) 등 70인과 무학(武學)의 한자순(韓自純) 등 8인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7재에) 나누어 있게 하였다.


  睿宗卽位, 制: 三京八牧通判以上, 及知州事縣令, 由文科出身者, 兼管勾學事. 二年, 制曰: “置學養賢, 三代以降, 致治之本也, 而有司議論未定, 宜速疾施行.” 睿宗, 方嚮文學, 遂下此制, 士類莫不欣然, 大臣無一人奉承, 時議惜之. 四年七月, 國學置七齋: 周易曰麗擇, 尙書曰待聘, 毛詩曰經德, 周禮曰求人, 戴禮曰服膺, 春秋曰養正, 武學曰講藝. 試取大學崔敏庸等七十人․武學韓自純等八人, 分處之.(『高麗史』권 74 志 28 選擧 )


3) 문인 귀족의 학술


  [해설]


  유교 경전이 통치 계급을 배양하는 교육 교재로 쓰이고, 관료 선발 시험인 과거가 문학적 능력과 함께 유교적 지식의 심도를 측정하는 제도였던 데 힘입어 고려시대에 유학은 문인 귀족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소양으로 정착되었다. 김부식(金富軾)30)과 윤언이(尹彦頤)31)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지목받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주역(周易)』 이론을 가지고 첨예한 논쟁을 벌인 사실은 그 시대의 정치적 실권자들이 동시에 심도 있는 유학 지식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 논쟁이 시사하는 또 하나의 사실은 고려시대에 이미 학문과 정치가 밀접하게 결합됨으로써 유학적 지식이 정치적 대결 구도에 묶여서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부정적인 결과도 수반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학문적 주제를 가지고 경연에서 논쟁을 벌인 배경에는 정치적 입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문벌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원문 번역]


  □ 김부식과 윤언이의 주역 변론


  묘청(妙淸)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칙(詔勅)을 내려 김부식(金富軾)·임원애(任元敱)로 장수를 삼고 윤언이로 보좌를 삼아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 보다 앞서 윤관(尹瓘)이 임금의 지시로 대각국사(大覺國師)의 비문(碑文)을 지었는데 글이 공교(工巧)하지 않아 그 문도(門徒)가 몰래 임금에게 아뢰어서 김부식으로 하여금 고쳐 짓게 하였다. 이 때에 윤관이 상부(相府)에 있었는데도 김부식이 사양하지 않고 지었으므로 윤언이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하루는 임금이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명하여 『주역(周易)』을 강론케 하고 윤언이를 시켜 질문하게 하였다. 윤언이가 『주역(周易)』을 정밀하게 알아 이것 저것으로 질문을 하니 김부식이 대답하기가 어려워 땀이 흘러 얼굴을 적시었다. 윤언이가 (김부식의) 막하(幕下)가 되자 김부식이 아뢰기를, “윤언이가 정지상(鄭知常)과 서로 깊은 관계를 맺었으니 죄를 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양주(梁州) 방어사(防禦使)로 좌천되었다.


  妙淸叛, 詔以金富軾․任元敱爲帥, 彦頤爲佐討之. 先是, 瓘奉詔撰大覺國師碑, 不工, 其門徒密白王, 令富軾改撰. 時瓘在相府, 富軾不讓遂撰, 彦頤心嗛之. 一日, 王幸國子監, 命富軾講易, 令彦頤問難, 彦頤頗精於易, 辨問縱橫, 富軾難於應答, 汗流被面. 及彦頤爲幕下, 富軾奏: “彦頤與鄭知常, 深相結納, 罪不可赦.” 於是, 貶梁州防禦, ..... ( 『高麗史』 권 96 列傳 9 諸臣 尹瓘/尹彦頤 )


4) 천인상감(天人相感)의 자연관


  [해설]


  경전 교육에 기반한 인재의 양성 및 유교적 윤리의 보급과 더불의 고려 유학의   특징의 하나로 주목되어야 할 것은 한대(漢代) 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천인상감적(天人相感的) 자연관이다. 즉 천문, 기상의 조화와 이변은 순수한 자연 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일과 밀접한 상관 관계의 있다는 사고이다.

  김부식과 함께 묘청에 대항하였던 고려 인종조의 문신 임완(林完)32)이 당시에 거듭된 자연재해가 당시의 실정에 대한 하늘의 견책(譴責)이라고 주장한 글, 고종조(高宗朝)33)의 사관 권경중(權敬中)34)이 명종(明宗)35) 실록(實錄)의 편찬 과정에서 조사한 사실을 토대로 자연 현상과 당시의 사건을 밀접하게 연관지어 설명한 장문의 보고서 등에는 자연은 곧 인사의 거울이므로 그것을 세심히 살펴 국정의 잘잘못을 판단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사고가 명료하게 표출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유학적 지식인들에게 뿌리깊이 주지되었된 천인상감적 사고는 성리학 도입 이후의 조선시대까지도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원문 번역]


  □ 임완(林完)의 재이설

 

  왕이 재변으로 인하여 조서를 내려 말을 구하니 임완(林完)이 상소하였다.

  “..... 요즈음 하늘의 변화에 이상이 있자 폐하께서 삼가 천명을 두려워하여 곧은 말을 듣고자 조서를 내려 구하시니 이는 만세의 복입니다. 신이 일찍이 동중서(董仲舒) 책문을 보니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도를 잃어 어지럽게 될 것 같으면 하늘이 먼저 재이(災異)를 내어 견책하고,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르면 또 괴이(怪異)를 내려 경계하고, 그렇게 하여도 오히려 고칠 줄 모르면 패망에 이르게 한다.  이것은 천심이 인군(人君)을 인애(仁愛)하여 그 어지러움을 그치게 하려 함을 보이는 것이요, 정말로 크게 무도(無道)한 세상이 아니라면 하늘이 그것을 붙들어 안전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군(人君)이 위로 하늘의 꾸지람에 응답하는 것은 힘써 충실로써 하지 안으면 안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 또 하늘은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로 깨우칠 수는 없으나 착한 것에 복을 내리고 음란한 것에 화를 내리는 것은 그 빠르기가 빛이나 소리와 같습니다. 몇 해 이래로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기근이 거듭 이르렀으며 근자에는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고 1월에는  뇌진이 특이(特異)하였으니 이것은 근고(近古)에 듣지 못한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 하늘에 응답하신 것이 겉[文]으로만 하시고 속[實]으로는 아니 하신 것입니까? 어찌 제사를 그렇게 자주 드렸는데도 변이(變異)가 많습니까. 하늘의 꾸지람이 이와 같은 것은 천심(天心)이 폐하를 인애(仁愛)하심이  마치 부모가 그 자식을 나무랄 때에 간절히 붙들어 안전하게 하려는 것과 같음을 충분히 보이신 것입니다. 폐하께서 어찌 힘써서 진실로 하늘에 응답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王以灾變, 下詔求言, 完上疏曰: “ ..... 近者, 天變異常, 陛下祗畏天命, 思聞直言, 下詔求言, 此萬世之福也. 臣嘗觀董仲舒策, 有曰: ‘國家將有失道之敗, 天乃先出災異, 以譴告之; 不知自省, 又出怪異以警懼之; 尙不知變, 而傷敗乃至. 此見天心之仁愛人君而欲止其亂也, 自非大無道之世, 天盡欲扶而安全之. 人君所以上答天譴者, 非勉强以實應之則不可也.’ ..... 且天之於人, 相去遼絶, 非言可諭, 而福善禍淫, 疾若影響. 比年以來, 災變屢作, 饑饉荐臻, 近者, 白虹貫日, 正陽之月, 雷宸特異, 此近古未聞也. 意者, 陛下 應天以文而不以實耶? 何其醮祭之煩, 而變異之多耶? 天之譴告如此, 足以見天心之仁愛陛下, 猶父母之譴告其子, 切欲扶持而安全之也. 陛下, 豈可不勉强以實而應之耶?” (『高麗史』권 98 列傳 11 諸臣 林完 )


  □ 권경중(權敬中)의 재이설


  신이 편찬(編纂)한 바 (명종 재위) 4년간에 재이(灾異)를 기록한 것이 얼마간 있습니다.  .... (그 가운데) 해가 붉고 엷어[薄] 빛이 없는 것, 해 주변에 배기(背氣)가 있는 것, 밖은 붉고 안은 누런 것, 해의 동서(東西)에 귀고리[珥]가 있는 것 등이 각각 한 번씩 있었습니다. 『전한서(前漢書)』 주(註)를 상고(詳考)하니, “해의 주변의 기가 곁에서 해를 대하고 있는 것을 이(珥)라 하고, 해를 향하여 있는 포(抱)라 하고,  밖으로 향한 것을 배(背)라고 한다. 배(背)는 배반(背反)의 상(象)이다. 기(氣)가 가서 핍박(逼迫)하는 것을 박(薄)이한다.”고 하였고, 『진지(晉志)』에 이르기를, “그 임금이 덕(德)이 없고 그 신하가 나라를 어지럽게 하면 해가 붉고 빛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꾸짖어 알리는 것이 어찌 간곡하지 않다 하겠습니까? 비록 조원정(曹元正)과 석린(石隣))의 무리를 제거하였어도 다시 동남(東南) 쪽의 적이 나와 종횡(縱橫)으로 난(亂)을 선동하는 자가 있으므로 하늘의 견책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이 때를 당하여 깨달음은 어찌 마무리 지음의 징조가 아니겠습니까? .....

  짐승의 변괴로는 호랑이가 궁(宮)에 들어온 것이 하나요, 표범이 성(城)에 들어온 것이 하나요, 머리 둘 달린 송아지가 태어난 것이 하나입니다. 호랑이와 표범은 산야(山野)의 사나운 짐승인데 이제 궁중(宮中)과 조로(朝路)에 나타나니 어찌 장차  이곳이 사나운 짐승의 소굴이 되려함이 아니겠습니까? 머리 둘 달린 송아지가 태어난 것은 하민(下民)이 통일되지 않을 징조(徵兆)입니다. 세상이 다스려지면 하늘의 변괴가 줄어들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하늘의 변괴가 많아집니다. 도(道)가 뛰어난  임금은 사람으로써 하늘을 다스리지만, 덕이 쇠하였을 때에는 하늘이 또한 꾸짖어 알리는 것입니다. 임금이 덕을 펼치고 정치를 행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순하게 하면 어찌 재앙이 소멸되 복이 이르지 않겠습니까?


  臣所編四年之閒, 記灾異者, 凡若干事. ..... 日赤薄無光, 日旁有背氣, 外赤內黃, 日有東西珥者, 各一. 按前漢書註云: “日旁氣在傍直對曰珥, 向日爲抱, 向外爲背, 背者, 背象也.” 氣往迫之爲薄. 晉志曰: “其君無德, 其臣亂國, 則日赤無光.” 天之譴告, 豈不丁寧乎? 雖去曹․石之輩, 復有東南之賊, 縱橫煽亂者, 故譴告如此. 當此時而覺悟, 豈非令終之兆乎?

  獸之怪, 虎入宮者一, 豹入城者一, 犢有兩頭者一. 虎豹, 山野之惡獸也, 今見于宮中與朝路, 得非將爲惡獸之所窟穴乎? 犢生兩頭者, 下民不一之兆也. 大抵世治則天變略, 世亂則天變繁. 道勝之君, 以人理天, 德衰然後, 天且譴告. 王者, 布德行政, 以順人心, 則灾何不銷, 福何不至哉. (『高麗史』권 101 列傳 14 諸臣 權敬中 )


5) 고려 유학의 쇠퇴


  [해설]


  귀족 중심으로 융성하였던 고려 유학은 극단적인 문치주의 편향에 대한 반동으로 무신란이 일어난 이후에 극도로 쇠퇴하였다. 무인집권기 중에도 최씨 정권은 서방을 설치하여 문인을 등용하였으나 이들의 역할은 집권자를 보좌하는 직업적 문한(文翰)의 성격에 국한된 것이었고,  고려 중기 이전처럼 유교적 문치 이념과 그에 입각한 통치술에 주안점을 둔 것이 아니었다.  무신집권기, 대원복속기를 거치는 동안 문인 귀족의 입지가 와해됨으로써 유학의 재흥은 기존 지배층이 아닌 신진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했으며 학문의 내용 또한 전기 유학의 학맥을 잇는 문인 귀족 중심의 유학이 아닌 새로운 성격의 학문이 요청되게 되었다.  고려말기에 신진 사대부 계층에 의해 새로운 학문 - 성리학(性理學)이 중국으로부터 수입되게 된 데에는 기성 학문의 기반 와해라고 사실이 그 배경으로 자리한다. 성리학 수용에 참여한 신진 사류의 한 사람인 이제현(李齊賢)36)이 충선왕(忠宣王)37)과 나눈 대화 속에는 고려 유학의 성쇠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 함축되어 있다.


  [원문 번역]


  □ 고려 유학의 쇠퇴 이유에 대한 이제현(李齊賢)의 설명


  예전 태조(太祖)께서 나라를 다스리시던 초창기에 시일의 여가가 없으실 때에도 제일 처음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으며, 한번 서도(西都)에 행차하시매 수재(秀才) 정악(廷鶚)을 박사(博士)로 삼아 6부(部)의 생도(生徒)를 가르치게 하셨고, 비단을 내려 학문을 권하고 늠록(廩祿)을 나누어 학생을 기르셨으니 마음쓰심이 간절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광종 이후로는 더욱 문교(文敎)를 닦아 안으로 국학(國學)을 숭상하고 밖으로 향교(鄕校)를 설립하여 벌여 여러 마을의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서로 들렸으니, 이른바 문물(文物)이 중화(中華)와 같다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불행히 의종(毅宗) 말년에 무인(武人)의 정변이 일어나 옥석(玉石)이 함께 타서 위기를 벗어난 자는 궁벽한 산으로 산에 도망가 숨어 유자의 옷을 버리고 승려의 옷을 입은 채 여생을 마쳤으니 신준(神駿) 오생(悟生)과 같은 사람이 그들입니다. 그 후 나라가 차차 문치(文治)를 회복하면서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이 생겨났으나 배울 곳이 없어 모두 승려의 무리를 좇아 강습(講習)하였습니다. 신(臣)이 학자(學者)가 석자(釋子)에게서 배웠다고 한 것은 그 그원이 여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 전하께서 학교를 넓히고 교육을 신중히 하며 육예(六藝)를 높이고 오교(五敎)를 밝혀서 선왕의 도(道)를 천명(闡明)하시면 그 누가 진유(眞儒)를 등지고 석자(釋子)를 따르겠읍니까?


  昔太祖經綸草昧, 日不暇給, 首興學校, 作成人材, 一幸西都, 遂命秀才廷鶚爲博士, 敎授六部生徒, 賜彩帛以勸, 頒廩祿以養, 可見用心之切矣. 光廟之後, 益修文敎, 內崇國學, 外列鄕校, 里庠黨序, 絃誦相聞, 所謂文物侔於中華, 非過論也. 不幸毅王季年, 武人變起, 玉石俱焚, 其脫身虎口者, 逃遯窮山, 蛻冠帶而蒙伽梨, 以終餘年, 若神駿․悟生之類是也. 其後國家稍復文治, 雖有志學之士, 無所於學, 皆從此徒而講習之, 故臣謂學者從釋子學,  其源始此. 今殿下, 廣學校, 謹庠序, 尊六藝, 明五敎, 以闡先王之道, 孰有背眞儒從釋子哉? (『高麗史』 권 110 列傳 23 諸臣 李齊賢 )




1)  윤사순, 「한국유학의 정착과정」, 『한국의 사상』(1984, 열음사) pp. 27-29 참조


2)  원광법사(圓光法師): 555(진흥왕 16)~638(선덕여왕 7)경. 신라의 승려. 성은 박씨(朴氏) 또는 설씨(薛氏). 경주 출신. 13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589년(진평왕 11)에 중국에 들어가 수학하고 600년에 귀국하였는데, 이 때 귀산(貴山) 등이 찾아와서 종신토록 지닐 계명(誡銘)을 구하였다.


3)  귀산(貴山): ? ~602(진평왕 24). 신라의 화랑. 원광법사(圓光法師)로부터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받았다.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여 나마(奈麻)에 추증되었다.


4)  이병도 『한국유학사』(1987, 아세아문화사) pp. 43-44 참조


5)  육재일(六齋日): 불교에서 재계(齋戒)를 닦는 날. 매달 음력 8․14․15․23․29․30일의 6일을 말한다.


6)  김춘추(金春秋): 603(진평왕 25)~661(문무왕 1).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재위 654~661.


7)  신문왕(神文王): ?~692(신문왕 12). 신라 제31대 왕. 재위 681~692.


8)  국학(國學): 신라시대의 교육 기관. 682년(신문왕 2)에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국학이라 했다가 경덕왕 때 태학감 ( 太學監 )이라 했고, 혜공왕 때 다시 국학으로 고쳐 불렀다. 예부 (禮部)에 속하였다.


9)  강수(强首): 생몰년 미상. 신라 중대의 유학자․문장가. 초명은 우두(牛頭). 중원소경(中原小京 :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의 사량(沙梁) 출신. 육두품 ( 六頭品 )으로 보이는 나마(奈麻) 석체 (昔諦)의 아들이다


10) 설총(薛聰): 655(태종무열왕 2)~ ? 신라 중대의 학자. 아버지는 원효(元曉),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11) 원성왕(元聖王): ? ~798(원성왕 14). 신라 제38대 왕. 재위 785~798. 


12) 788년(원성왕 4)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시행


13)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 신라 하대의 학자․문장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견일(肩逸)의 아들. 868년(경문왕 8)에 12세의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7년만인 874년에 18세의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885년 귀국하여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였으며,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자신의 개혁안이 실현될 수 없게 되자 관직을 버리고 소요하였다. 저술로는 시문집 『계원필경』20권 등이 있다.


14) ‘無偏無黨, 王道湯湯.’ (『書經』 周書 洪範)


15) ‘孝子不匱, 永錫爾類.’ (『詩經』 大雅 生民之什)


16) 태조(太祖) 왕건(王建): 877(신라 헌강왕 3)~943(태조 26). 고려 제1대왕. 재위 918 ~ 943. 


17) 훈요십조(訓要十條): 태조 왕건이 죽기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希)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후손에게 전하게 한 10조목의 훈요. 각 조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선종(禪宗)․ 교종(敎宗)의 사원을 관리할 것.

    2. 사원의 개창은 도선(道詵)의 풍수지리설을 따라 함부로 하지 말 것.

    3. 왕통은 적자 계승을 원칙으로 할 것.

    4. 중국의 풍속을 따르되 우리나라의 사정을 고려할 것.

    5. 서경(西京)을 중요시할 것.

    6. 연등(煙燈)․팔관(八關)의 행사를 준행할 것.

    7. 간언을 따르고 참언을 멀리하며 상벌을 바르게 할 것.

    8. 차령(車嶺) 이남 금강(錦江) 바깥 지역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 것.

    9. 제후와 관료의 녹봉을 함부로 가감하지 말고 병졸을 보호할 것.

   10. 경사(經史)를 보아 옛일을 거울 삼아 오늘을 경계할 것.


18) 성종(成宗): 960(광종 11)~997(성종16). 고려 제6대 왕. 재위 981~997.


19) 최승로(崔承老): 927(태조 10)~989(성종 8). 고려 전기의 문신․재상. 신라 6두품인 은함(殷含)의 아들. 신라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들어와 문장과 학문 계통의 관직 생활을 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


20) 시무책(時務策) 28 조: 982년(성종 1) 최승로가 지어 성종에게 올린 문서. 당시에 이루어야 할 정치개혁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28개 조목으로 나누어 피력한 글. 현재는 그 중 22개조의 내용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 내용은 1. 국경 수비의 강화 2. 공덕재(公德齋)의 폐단 시정 3. 시위 군졸의 축소 4. 왕의 보시 행위 시정 5. 사무역의 금지 6. 사찰의 이식(利息) 행위 금지 7. 외관직의 설치 8. 승려의 궁중 출입 반대 9. 관복의 제정 10. 승려의 역관 출입 금지 11. 중국의 제도와 고유 풍속의 참작 12. 도서(島嶼) 거주민의 부세 경감 13. 연등․팔관 행사의 축소 14. 신하에 대한 예우 15. 궁중 노비와 마필의 감축 16. 사찰 신축 통제 17. 주거 건축 제도의 정비 18. 사치스런 사경(寫經)․불상제작의 금지 19. 공신 자손의 예우 20. 유(儒)․불(佛)의 역할 분담 21. 제사(祭祀)의 남행 금지 22. 양천(良賤) 제도 유지 등이다.


21) 양인(楊引): 후위(後魏) 양원(襄垣) 사람. 75세에 모친을 잃고 슬퍼한 것으로 인하여 정문(旌門)을 받음. (『魏書』 권86 / 『北史』권84 )


22) 왕상(王祥): 진(晋) 임기(臨沂) 사람. 중국 24명의 효자 중의 한 사람. (『晉書』 권33 王祥傳)


23) 오효(五孝): 신분에 따라 구분된 다섯 종류의 효도 즉 천자(天子)․제후(諸侯)․경대부(卿大夫)․사(士)․서(庶)의 효(孝).


24) 삼교(三敎): 유교(儒敎)․불교(佛敎)․도교(道敎)


25) 문종(文宗): 1019(현종 10)~1083(문종 37). 고려 제11대 왕. 재위 1046~1083.


26) 예종(睿宗): 1079(문종 33)~1122(예종 17).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 


27) 인종(仁宗): 1109(예종 4)~1146(인종 24). 고려 제17대 왕. 재위 1122~1146.


28) 최충(崔冲): 984(성종 3)~1068(문종22).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 ( 海州 ). 자는 호연(浩然),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29) 국학(國學): 고려시대의 국립대학. 태조 때부터 있었으며 초기의 명칭은 신라의 것을 계승한 국학(國學)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992년(성종 11) 국자감(國子監)으로 명칭을 바꾸었다가 1275년(충렬왕 1)에 원나라의 간섭으로 다시 국학으로 개칭되었다. 1298년 충선왕이 성균감이라 고쳤고, 1308년에는 충선왕이 다시 즉위하면서 성균관이라 하였다. 그 뒤 1356년 공민왕의 배원정책에 따라 다시 국자감이라 하였다가, 1362년에 성균관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30) 1075(문종 29)~1151(의종 5). 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문학가. 본관은 경주 ( 慶州 ). 자는 미상, 호는 뇌천(雷川).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31) 윤언이(尹彦頤): ?~1149(의종 3).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 문하시중을 지낸 윤관(尹瓘)의 아들. 시호는 문강(文康).


32) 임완(林完):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송나라 사람으로, 귀화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예부원외랑까지 승진하였다. 왕이 재변(災變) 때문에 구언(求言)의 조서를 내리자 이에 응대한 장문의 상소가 유명한데, 이것은 당시 묘청 등의 대화궁(大華宮)이 재이에 대한 대응책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하고 군주의 수덕(修德)을 강조한 것이다.


33) 고종(高宗): 1192(명종 22)~1259(고종 46). 고려 제23대 왕. 재위 1213~1259. 


34) 권경중(權敬中):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문과에 급제, 박사가 되었다.


35) 명종(明宗): 1131(인종 9)~1202(신종 5). 고려 제19대 왕. 재위 1170~1197. 


36) 이제현(李齊賢): 1287(충렬왕 14)~1367(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학자․정치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검교시중(檢校侍中) 이진(李瑱)의 아들이자, 고려말 성리학 도입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인 권보(權溥)의 사위. 저술 익재난고(益齋亂藁)』10권과 『역옹패설(櫟翁稗說)』 2 권이 현존한다. 시호는 문충(文忠). 


37) 충선왕(忠宣王): 1275(충렬왕 1)~1325(충숙왕 12). 고려 제26대 왕. 재위 1298, 1308~1313.